독일에 오기 전, 저는 날씨가 그냥 "날씨"인 줄 알았어요. 맑으면 맑고, 흐리면 흐리고. 그런 거잖아요.
근데 독일 날씨는 달라요. 날씨가 아니라 인격체예요. 변덕스럽고, 충동적이고, 아무 예고 없이 삶을 망가뜨리는 그런 인격체. 오늘은 독일 날씨와 2년을 동거해본 제가, 이 친구의 정신 상태를 낱낱이 고발해드리겠습니다.
하루에 사계절이 다 온다
진짜예요. 과장 아니에요. 독일에서의 하루를 타임라인으로 그려드릴게요.
날씨 앱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
한국에서는 날씨 앱이 꽤 믿을 만했잖아요. 비 예보 뜨면 진짜 비 오고, 맑음 뜨면 진짜 맑고.
독일에서 날씨 앱은 그냥 창작 소설입니다. 구름 아이콘 떠있는데 맑고, 해 아이콘 떠있는데 비 오고. 저는 이제 날씨 앱 보다가 웃음이 나와요. "오늘 맑음이래. 하하."
아침에 고른 옷이 오후의 적이 된다
이게 진짜 일상의 공포예요. 아침에 옷 고를 때마다 러시안 룰렛을 하는 기분이랄까요.
저 이제 진짜로 가방에 얇은 패딩을 접어서 넣고 다녀요.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패션? 그건 한국에 두고 왔습니다.
겨울이 무려 6개월이다
한국 겨울은 12월에서 2월, 대략 3개월이잖아요. 근데 독일은 10월부터 흐려지기 시작해서 진짜 따뜻해지는 건 5월 이후예요.
참고로 독일 겨울에는 오후 4시면 해가 져요. 비타민 D는 필수 아이템이에요. 독일 약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게 비타민 D라는 게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비가 소리 없이 온다
독일 비는 그냥 와요. 하늘을 보면 멀쩡한데, 얼굴에 뭔가 닿아요. 그냥 어느 순간 비가 내리고 있어요. 시작도 끝도 모르게.
그리고 이 비가 딱 "우산 쓰기엔 좀 애매하고, 안 쓰기엔 맞는" 그 절묘한 강도로 와요. 이건 고의라고 생각해요.
여름엔 에어컨이 없다
독일 여름 날씨는 30도를 넘는 날도 꽤 있어요. 근데 건물에 에어컨이 없어요. 카페도, 마트도, 심지어 학교도.
그래도 맑은 날은 진짜 황홀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쏟아지는 햇살, 22도의 바람. 이 조합이 실현되는 날은 진짜로 "아, 내가 여기 살고 있구나"가 느껴지는 날이에요.
그러다 보면 나도 독일인이 된다
1년 살고 나면 신기한 일이 생겨요. 10도에 "좀 쌀쌀하네" 하게 되고, 비가 와도 "뭐, 그럴 수 있지"가 되고.
어쩌면 삶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갑자기 진지해서 죄송합니다. 독일 날씨가 저를 철학자로 만들었어요.)
독일 날씨 생존 가이드
- 가방에 접이식 우산 항상 넣기. 날씨 앱 보지 말 것.
- 레이어링이 정답. 아침엔 패딩, 안에 반팔. 더우면 벗으면 그만.
- 10월부터 비타민 D 챙기기. 독일 겨울은 뼛속까지 어두움.
- 맑은 날 나왔다고 생각되면 하던 일 멈추고 무조건 밖으로.
- 날씨에 기대 접기. 계획 B 항상 준비.
그래서 살 만하기도 합니다
불평하면서도 적응하고, 적응하면서도 웃게 되는 것.
독일 날씨가 준 의외의 선물이에요.
오늘도 독일 어딘가에서 우산 없이 비 맞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